티스토리 툴바


The Odysseia : [Part 2] Continuance of the epical reality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오스의 영광된 해안가와 에우마이오스의 은밀한 헛간 사이에는 분명히 어떠한 간극이 존재한다. 요컨대 거기엔 현존을 세계의 저편에 머무르게 한 균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한 표현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하고 만다. 이제 총체적 세계의 잠재성은 가능성의 교차를 통해 기억으로서의 과거를 이루며, 본질은 삶이 되기 위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여정이요, 서사시적 현재이다. 그들의 전개에 의해 세계는 회백색 공간의 여백을 채워나간다. 즉 헥토르의 죽음은 일리오스의 모든 것을 통해, 그리고 그 모든 것 또한 헥토르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는 반면, 오딧세우스의 지혜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세계의 공백으로 나아갈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리하여 순수성을 가장한 목마의 내부에 자리 잡은 현실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의 가능성들을 교묘히 뒤섞음으로써 자신의 목적이 바라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세계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며, 그로인해 새로이 지향된 의도들은 탈색된 세계를 얻고 신성은 예정된 조화를 의식 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결국 오딧세우스의 지혜란 총체적 세계에 출현한 내면성 그 자체이다. 거기에는 아직 어떠한 일관성도 도덕성도 없다. 간단히 말해 그의 행위란 모조리 기만이다.[각주:1]

  그것이야말로 외부와의 일치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균열을 비추는 원형적 단어다. 그것은 본래 모든 이들을 향하여 순수하게 열려있었던 세계를 새로이 규정된 내면의 순수한 심연 속으로 끌어내려 본질적 형상들에 일치시킨다. 폴뤼페모스를 통해 불린 오딧세우스의 이름은 그러한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딧세우스이며, 동시에 오르실로코스를 죽인 나그네와 크레테 출신의 거지이고, 한편으로는 데우칼리온의 아들 아이톤이자, 숫양에 매달린 '아무도 아니nobody'다.[각주:2] 이들은 모두 오딧세우스의 모습이며 동시에 어느 것도 완전한 그의 모습은 아니다. 이타케의 위대한 왕이 귀향의 여정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헤시오도스가 소원한 서정적 교훈도,[각주:3] 플라톤이 말했던 조화로운 지성적 영혼도,[각주:4]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닮은 숭고함도 아니다. 그런 모든 영역들 이전에, 오딧세우스는 세계가 바라는 모든 요구를 충족하며 세계 그 자체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도록 한다. 요컨대 오딧세우스가 사이렌 자매의 노래를 듣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며, 헬리오스의 가축들을 죽이지 않고 제우스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도 인내와 겸양의 결과가 아니다. 그가 이스마로스를 약탈하고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살해한 행위가 용인되는 것 역시 결코 그들에게 절대적인 죄악이, 그에게는 그것을 심판할 정의가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그는 세계가 제시하는 외재적 본성들의 틈새에서 다른 이들보다 스스로를 더욱 잘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외부를 향해 뻗어있는 원형으로서의 원시성과 함께 내면에 자리 잡은 목적적 기만은 세계 속에서 그의 행위를 결정하며 또한 심판한다.[각주:5]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올바르지 않다. 단지 그는 — 서사적 의미에서 —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훌륭할 뿐이다.




  그러한 본질은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딧세우스는 키르케의 동굴에서도, 알키노오스의 저택에서도, 아르고스의 죽음 앞에서도 동일한 원형으로 남는다. 그는 성장하지도 또한 퇴보하지도 않으며, 그의 내면이 바라보는 균열된 세계 역시 그 자신을 비본질적으로 만드는 어떠한 부분도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어찌되었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분리되지 않은 세계이고, 그의 기만이 존재하는 모든 목적은 동일한 세계의 지속과 계승을 위해서이다. 결국 그가 겪은 여정은 본질로부터 분리된 그의 자아가 겪어야만 하는 장애나 회복의 계기들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의미한다. 그 안에서 시간적 상징과 동일시되는 기억과 그의 외적 훌륭함을 구현하는 육체만이 귀향하는 이십년을 잇는 오딧세우스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귀향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다. 사이렌의 노래가 그토록 강력하고 두려운 것은 그들을 향한 영광이 과거로부터 온전히 남아있으며, 그 과거가 고귀한 칼륍소의 매혹과 마찬가지로 영원과 함께 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각주:6] 역으로 말하자면, 오딧세우스에 의해 암시되는 세계의 내면적 각성은 그의 귀향이 목적하고 있는 바와 동일시될 특정한 지표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오딧세우스의 조언자는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재생케 하며, 그것을 독려하고 완성한다. 사실 텔레마코스와 네스트로, 메넬라오스의 만남은 오딧세우스의 귀향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페넬로페의 기다림이나 텔레마코스 자신의 마음에도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세계의 질적 동일성이 귀향한 오딧세우스의 계승을 긍정하도록 할 필요성과 목마가 가져온 세계의 내적 변화를 시간의 흐름과 일치시키기 위해 이루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이루는 것이 과거이며, 그것이 새로이 충족될 미래가 신성과 격정의 모순을 대신하더라도, 여전히 세계는 서사시적 현재이고 본질의 귀의이며 소통인 셈이다.

   물론 오딧세우스에게 주체적 동일성과 내면화된 인식 주관의 한계를 짐지우는 것은 지나치게 근대적이다. 여기서의 동일성은 주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내면적 본질의 통합성을 의미할 것이다. 즉 앞서도 말했듯이 일체화되어 존재했던 일리아스의 본질적 세계가 현실적 존재로서의 내면을 통해 심화되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오딧세우스에게 있어서도 문제는 여전히 삶의 형상적 상태들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본질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일상과 현실의 대응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지닌 본질적 형상들의 갈등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삶 그 자체의 계기들이 갖는 시간적 동일성의 변주를 의미한다. 페넬로페와의 재회가 아니라 구혼자들의 복수자들에 대한 처리가 오딧세이아의 마지막을 이루며, 거기서조차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이어지는 오딧세우스의 시간과 파이아케스족의 삶과 올림포스의 존속을 의미한다. 『오딧세이아』는 하나의 완결, 세계의 구원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리아스』의 마지막이 아킬레우스의 죽음조차 담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오딧세우스의 귀환은 서사가 지니고 있는 시간적 동일성을 과거로부터 전해줄 뿐이다.




  그토록 영원히 열려있는 시간과, 변화와 함께 살아있는 동일한 원형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떠한 것과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아는 바의 이란 수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며, 아마도 이는 지혜를 삼킨 인류의 위대한 소화 작용이 절반만 이루어졌음을 증명할 것이다. 시간과 변화의 일치는 본질적 형상들의 영역에서는 모순이 되며, 동시에 세계의 형상들에 관하여 부여될 지각적 한계들을 도출한다. 의식에 떠오르는 심연과 총체성을 향한 착각은 음식으로부터 고립된 소화 기관의 반항기로부터 추출된다. 인간 정신의 유한성은 언제나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되며, 후식이 나올 즈음에는 더욱 그렇다.




  1. 사실상 이는 『오딧세이아』의 거의 모든 행위를 표현한다. 거지로 나타나 아내와 아들조차 시험하는 오딧세우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페넬로페의 경우 낮에 짰던 수의를 다시 밤에 풀어 구혼자들을 속이며, 텔레마코스도 구혼자들은 물론 어머니와 모든 집안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퓔로스로 출항한다. 또한 제우스가 헬리오스의 소를 죽인 죄로 내려진 재앙 역시 잔잔한 바다로 하여금 오딧세우스 일행을 출항하도록 한 뒤에 이루어졌고, 조언을 건네는 신들 역시 다른 인간의 모습을 빌어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일리아스』에서도 신들의 조언이나 직접적인 참여는 인간의 모습을 빌어 나타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메넬라오스와의 싸움에서 도망친 파리스를 위로하도록 아프로디테는 노파의 모습으로 헬레네를 종용했고,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위해 아테네는 데이포보스의 모습으로 헥토르를 부추겼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며, 인간에게 이러한 변신은 불가해한 영역에 있다. [본문으로]
  2. (9:364-535).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경기: 도서출판 숲, 2006), pp.205-13. [본문으로]
  3. "…나는 나 자신도 내 아들도 사람들 사이에서 의롭기를 원치 않소. 왜냐하면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이오, 만약 덜 의로운 자에게 더 큰 정의의 상(賞)이 주어진다면 말이오. 하지만 바라건대, 지략이 뛰어나신 제우스께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오. 오오, 페르세스여,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하고 정의에 귀 기울이되 폭력일랑 아예 잊어버리시라!(270-275)" 헤시오도스, 천병희 옮김, 『신통기』(경기: 한길사, 2004) 가운데 「일과 날」, pp.101-2. [본문으로]
  4. "…거기서 오디세우스가 말하고 있지. '하나, 그는 제 가슴을 치면서 이런 말로 제 심장을 나무랐다. 심장이여, 제발 참아다오. 일찍이 이보다 더 험한 일도 참았거늘' 그래 자네는 호메로스가 혼이 조화라고 그리고 몸의 느낌들에 의해 이끌리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 혼이 이것들을 이끌고 이것들에 대해 주인 노릇을 하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그리고 조화와 비교하기에는 훨씬 신적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서 그걸 지었으리라 생각하는가?(94d)" 플라톤, 박종현 역주, 『플라톤의 네 대화편 : 에우티프론/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서울: 서광사, 2003), p.386. [본문으로]
  5. 그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자기 안에 고립된 가능성들을 외부로 실현시킨 돈키호테의 여정은 진정 오딧세우스를 닮았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중세 기사와 지옥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고대의 왕 사이에는 아무런 반전도 없다. 전자가 광인으로, 후자가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세계의 일상성의 차이가 낳은 상(象)일 뿐이다. [본문으로]
  6. 이는 텔레마코스에서도 동일하다. 물론 그에게 나타나는 망각은 네스트로나 메넬라오스의 선의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인께서 환대하기를 열망하시며 내 뜻을 거슬러 나를 자기 집에 붙드실 것이오. 하지만 나는 되도록 빨리 집에 돌아가야만 하오.(15:199-201)"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경기: 도서출판 숲, 2006), p.333.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Trackback 0 Comment 0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