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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dysseia : [Part 1] From the dawn of the Illios



 
세계가 만약 하나의 전체로서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결정체라면, 그것은름붙일 수 없는 충만함으로 인해 영속된 시간을 거부할 것이다. 또한 세계가 완연한 사선들의 교차로서 놀랄 만큼 정교하며 아무도 알지 못할 만큼 작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공간을 선택받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실체들은 본질로서 부여된 이름 속에 그 자체 하나의 의미를 담고, 운명은 있어야만 하는 모습 그대로 오롯하여, 심연은 깊지만 적막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새긴 투명한 그림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한 충만함으로부터 일리오스의 해안과 성벽들이 자라난다. 트로이는 흙과 모래가 아니라 세계에 의해 현존하며 — 따라서 트로이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발견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실존한다는 증거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모든 인간은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아니라 신성이자 격정, 욕구의 총체로서 현존한다. 불변하는 진리와 도덕의 준거들도, 관음증 걸린 신과 호수 위를 걷는 남자도, 무의식과 그것이 낳은 괴물들의 역사성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 가진 유일무이한 긍정성을 표현한다. 밝고 무한한 대지 위에는 각각의 원형 자체가 놓여 있고 가치들의 그림자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외재적 본성이 모든 관계를 지배한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조차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페넬로페와 오딧세우스의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 신화이며,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추격도 신과 더불어 달려간다.

  그렇게 망설임도 상처도 없이 열망된 총체성은 각각의 의지를 향해 선형적으로 뻗어나가며, 다른 한편에서 그들의 의지 각각을 분리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형상들의 규준에 투영한다. 의지로서의 신탁과 예언은 주어진 세계의 궤적을 그릴 뿐, 결과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 자체를 낳는다. 각각의 궤도가 극점에 이를수록 세계를 닮은 총체성의 파편들은 유기체의 일관성을 닮아가고, 결정화되기 위한 응고점에 이르러 종국을 맞이한다. 그러나 어디에서건 가둘 수 없을 순수한 역동성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오직 표층으로 떠오른 노래가 전(前)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가만히 존속할 따름이다. 이 꾸밈없는 원시적 광기움직임은 일리아스 서사시 전체에 걸쳐 있다. 그들에게 대화란 오직 행위이다. 감각에 의해 전달될 표현 속에서조차 이미지는 끊임없이 살아있다. 생각과 언어는 다만 노래에 이르러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나타난다. 일리오스의 순수성이 여명으로부터 밤에 이르는 동안, 그것은 신성 그 자체를 모방하고 하나의 흐름으로 충만했던 세계에 균열을 풀어놓는다. 균열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스스로를 의식이라 부름으로써, 비로소 세계는 하나의 시작을, 총체성이 아닌 동일성을 인지할 존재들의 시선을 갖게 된다. 더 이상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요, 하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존재성의 계기가 발견하는 기억들은 세계의 가능성을 현존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형상들은 자신을 살아갈 뿐 아니라 자신을 알아가는 존재를 통해 사물의 이면을 향해 진동하기 시작하며, 불확실하면서도 모든 것이 포함될 세계 전체가 자신의 외부를,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창조이고, 또한 창조의 이름으로 점지워진 세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요컨대 의식 존재로서의 인류의 근원은 신도 낙원도 번갯불도 아니다. 그것은 목마다.




  목마의 이중성, 세계에 맞닿은 외연과 놀랍도록 감춰진 내부의 모순된 균형은 새로이 나타난 원형적 단위들의 이면성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각주:1] 바다를 닮은 이 바퀴달린 거대한 목조상은 진흙과 프로메테우스의 관용으로 빚어진 못생긴 무리들에게 추수할 수 없는 대지 위의 심연을 의도한다. 그리하여 신의 제물을 가장한 채 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목마 속에서 인류는 필연적으로 신의 제물을 가장한 채 신의 모습을 모방하는 존재로 잉태되었고, 모든 것이 영원히 —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 바뀌어버린다. 이제 행위는 고뇌와 망설임을 통해 비로소 실체가 되며, 존재는 신성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충족하는 한편 격정을 사유한다. 총체성은 스스로를 인식함으로써 외부를 낳고, 각각의 의지는 형상들의 직접적인 투영으로서 얻어진 이름으로 불린다. 세계의 부분들이 세계를 이루며 조각된 부조(浮藻)로 하여금 그것을 추측하게 한다. 이제 노래는 위대한 인간의 여정이 되어 교차되는 공간과 시간적 흐름 속에 놓이고, 예언은 도달하게 될 목적과 미래가 아니라 고고한 선택의 갈림길에 세워진 표지가 된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신적인 의지를 향해 내려오는 반면, 오딧세우스의 귀향은 인간 의지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말하자면 오딧세우스의 여정에 주어지는 신들의 조언은 필연적 결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예언되는 결과들에 대한 선택의 계시이고, 그의 여정이 나아갈 세계의 부분들에 관한 도움에 머무른다. 라에르테스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조언들은 그 목적에 가까울수록 보다 더 자유롭다. 그렇기에 거기서 도출되는 것 역시 일체화된 본질이 갖는 순수성이 아니라 본질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인간적 한계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본질로부터 유리된 비형상적 삶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망(迷妄)은 여전히 신에 비추어 나타나고, 일체된 형상적 삶은 완결된 시간 속에 머무른다. 오이디푸스와 달리 오딧세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운명으로의 항진은 탈각된 형상들을 생성하거나, 그 자체로 비본질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일상적 자아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질문은 아직 '누구'라는 말을 모르며, '왜'라는 말도 낯설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던 장면을, 그리고 그의 숙연한 청중들을 보라 : 현실이 하나의 이야기로, 예언자가 낭송자로, 환영과 실제의 뒤섞임이 무대와 객석으로 온전히 수렴되자마자, 역사와 서사시는 의도된 구성과 시선의 공백을 요구하는 비극이 된다. 이야기의 목적적 구성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러티브적 형상화는 여기서는 아직 삶 그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딧세이아』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균열이
『일리아스』가 지니고 있었던 삶과 본질의 분리를 의미하기보다는 — 비록 그것의 시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더라도 — 그것의 여명기로부터 도래하는 병리된 두 가지 무대의 갈등, 즉 분열되기 시작한 본질적 층위의 간극에 대한 호소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대는 각각의 삶과 본질을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한쪽으로 이루어진 탈각화된 삶이 다른 무대로 하여금 리얼리티의 반증을 증명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양자는 동일한 이며, 향연이다.





  1. "말"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상징이며,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그리스 연합군이 평안한 귀향을 바라며 포세이돈 신에게 바친 제물로 보았다. 즉 목마는 신(포세이돈)의 모습을 한 채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며, 그와 동시에 토르이의 파괴와 전쟁의 종결 및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자기 안에 담고 있는 이중적 상징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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