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man - Red Son : 충격과 공포
Books 2010/05/25 00:37
그래서 이런 글을 남기게 되어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책은 정말로 도를 넘어섰다.
물론 나는 마크 밀러의 의심할 바 없는 역작 중 하나이자, 최고의 슈퍼맨 엘스월드(elseworld) 에피소드 선정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이 책의 내용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충분히 매력있는 이야기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고, 또 기대만큼은 해준다는 걸 인정하는 바다.
문제는 국내 출판사의 번역과 편집이다. 이 책은, 번역자가 원문 언어만 할 줄 안다고 해서 번역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며, 편집자가 출판에 있어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때 얼마나 웃기는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오탈자는 기본이고 비문이 난무한다. 시공사에서 출간한 그래픽 노벨 중에 "킹덤 컴"이나 "시크릿 워" 등도 나름의 경쟁 상대가 되지만, 이건 정말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몇 개만 골라서 소개한다.
"...난 심지어 사람들이 말하는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In my more introspective moments, I even wondered if people were behaving more carelessly in the hope that they might catch a glimpse of ther gaudy circus clown)." [p.9]상당히 아름다운 비문이다. 이건 번역 작업에서 동반될 수 있는 원문 해석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원문을 확인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나(I)"이고, 전체 술어부는 "생각한 적도 있다(even wondered)"이다. 그리고 "사람들(people)"에 호응하는 술어는 "하고 있다(behave)"이다. 하지만 번역문에서는 if 절 이하 문장, 즉 "사람들~" 이하의 안긴 문장 처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나"에 대응하는 술어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처럼 보이며, 대신에 "사람들(people)"에 대응하는 술어부는 "말하는"처럼 보인다. 즉 번역된 문장 구조를 고려할 때 그 의미는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나는 경솔한 행동을 했고,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에 대해서 말했고, 나도 그걸 보고 싶었다."
원문에서 "하고 있다(behave)"의 주어는 "사람들(people)"이지 "나(I)"가 아니다. 이 모든 건 "사람들이 말하는"이라는 구절에서 "사람들"의 주어-술어 호응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혹은, 원문에 더 충실한다면, (아마도) "말하는"에 호응하는 주어인 "그들(they)"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 번역문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술어와 호응한다고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런 경우엔 "말하는"과 호응하는 주어가 없으므로 역시 비문이다. 본래의 번역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제대로 번역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난 심지어 사람들이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주어-술어 호응은 그럭저럭 이루어진다. 주어-술어 호응을 문장 안에서 구현하지 못한다는 건 영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한국어가 안 된다는 거다. 아니면 그걸 고칠만큼 성의가 없거나. 이런 예는 더 있다.
"난 그동안의 시간을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쓸 거야(This time will be spent devising a plan to humilate and defeat Superman just as he has humiliated and defeated me)." [p.43]놀랄만한 비문이다. 영어 수동태 문장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되면 일견 어색한 것이 사실이고, 능동태로 바꾸어서 번역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그것과 무관하다. 문장을 능동태로 옮기면, 의미상 주어가 "나(I)", 최종 술어는 "쓰다(spend)", 목적어가 "시간(time)"이 되는 건 맞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의 호응 관계가 엉망이다. 원문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이 문장에서 목적어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킨다. 즉 "앞으로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쓸 것이다(will spend)"이지, "그동안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썼다"가 아니다. 아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을 단일한 문장 수식 성분으로 번역하려고 하면서 발생한 오류 같은데, 그렇다면 "그동안"이 수식해야 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이 수식 성분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여하간에 이 문장은 너무 엉망이라서 손을 대기도 힘들다. 그래도 고쳐본다면,
"난 그동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앞으로의) 시간을 쓸 거야."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just as 이하를 잘라내서 문장 두 개를 만들거나.
이정도만 해도 번역자나 편집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편집 작업을 한 건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대미를 장식할 표본이 아직 남아 있다. 난 아래 문장을 보면서 울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연구하면서 세상에 그들의 빛나는 '레드 선'이 내 힘을 약하게 하였으며 내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But he's been acting strange lately: working too hard and telling the world that our bright red sun that has dimmed my powers and aged my mind is in danger of consuming us)." [p.-5(from last page)]희망이 없다. 의미 전달이 전혀 안 된다. 비문인 건 당연하고, 영어 문장 부호 콜론(:)에 대한 고려도 안 되어 있으며, 아예 해석 자체가 틀려 먹었다. 제일 큰 문제는, 번역문의 뒷 문장에 주어가 없다는 거다. 즉 "(말)하다"란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가 없다. 주어 없이 완성된 서술문을 만드는 건 초등학생이나 하는 실수다. 대강의 사정은 이해가 간다. 원문에는 콜론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뒷 문장은 앞 문장의 "그(he)"가 "기이하게 행동하는(be acting stange)" 것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독립 문장이 아닌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 문장으로 옮겼을 때 마침표(.)로 콜론을 대체하고 두 부분을 다른 문장들로 완전히 분리했다면, 당연히 뒷 문장에도 "그"라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콜론을 그대로 살리거나.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고 해도, 번역자가 원문이나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의문이다. 원문에서 telling 이하만 보면, 이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는 물론 "그(he)"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번역문에서 그는, 의미상 다음과 같은 걸 말한다.
- 빛나는 레드 선이 나(슈퍼맨)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나(슈퍼맨)의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Red sun
.....
-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이성)을 지치게 한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의미상으로도 이게 맞다. 한편, 이 실수가 너무 커서 뭐라 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번역문에서 대체 "세상에"는 뭔가? 이렇게 써 놓으면, 읽는 사람의 대다수는 "세상에 빛나는"으로 붙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단어를 목적어 뒤, 즉 동사에 붙여 쓰는 게 한국어에서는 더 읽기 편하다. 즉 "S가 ~를 A에게 말했다."는 식으로. 그런데 설마 정말로 저런 의미로 옮긴 것은 아니겠지. 그러길 빈다. 돈을 받고 번역 작업을 하는 전문 번역자가, 인쇄된 출판물을 판매하는, 그것도 꽤 이름있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그런 실수를 한다는 건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다시 번역해보면,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연구에 매진하면서,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을 지치게 한 저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약간의 의역과 모호한 문장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의미 전달에 큰 이상은 없다고 생각된다.
실로 번역이란 단어 대 단어 혹은 문장 대 문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원문 텍스트 대 번역 텍스트, 원문 언어와 번역 언어, 나아가 원문 언어와 도착 언어가 기반하고 있는 두 세계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 작용이 구현하는 원문에의 충실함과 번역문의 매끄러움 사이의 긴장은 그것이 두 언어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소통의 장애를, 의미 등가의 비존재와 번역 불가능성을 뛰어넘는 철학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실무 번역자들이 번역 자체에 관한 성찰을 반드시 할 필요는 없다. 사실 베르만이나 휠덜린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좀 피곤하기도 한 일이며, 망또를 걸친 슈퍼 히어로를 즐기는 것이 세 배쯤 건강에 좋을 테니까. 번역 작업이 갖는 철학적인 의미들과 무관한 영역에서도, 번역은 극히 어려운 일이고, 언어 능력과 감각이 뛰어난 사람 역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들이 완전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영어 실력은 그닥 좋지 않으며, 한국어 실력이나 언어 감각도 높지 않다. 아마 이 글에도 비문이나 문장 오류가 몇몇 있을테다. 따라서 나한테 다른 사람의 번역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건 꽤 올바른 생각일게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더라도 너무하다고 여길 정도로, 이 책은 편집과 번역이 원서를 처절하게 망쳐놓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아이언 맨"마저 이 모양이라면, 이 번역자의 작품은 불매 운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픽 노벨에 대한 애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번역자와 출판사가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 1986년 발간된 세 권의 그래픽 노벨이 이후 세대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나다. 이들이 바로 알란 무어(Alan Moore)의 "왓치맨(Watchmen)", 프랑크 밀러(Frank Miller)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The Dark Knight Returns)", 그리고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의 "쥐(The Maus)"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본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