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oétique de l'espace, "공간의 시학" : [Part 2] symposium
Books 2009/08/27 00:11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저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현상학자가 다루는 주제는 공간의 이미지들이다. 공간 -- 보다 일반적으로 '장소'라 일컬어지는 공간 -- 이란 통상 하나의 생활이다. 그것은 거기에 매개된 시간과 함께, 삶의 행동과 가치, 앎과 이상을 자리지울 수 있는 현실성의 담지자로서 소요한다. 그것은 실재實在보다는 낮고, 빔空보다는 높은 그러한 시선에 접하면서, 우리를 이리저리 이끌고, 또 이끌려온다. 우리가 바라보는 잉여적인 자기 존재란 손쉽게 하나의 공간으로 귀결하며, 따라서 우리 존재의 활동 방식 전체의 구상 또한 공간에 심리적인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즉 정신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비감각적으로 스스로를 정위定位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을 자신의 관습적인 형태들 안에 세세히 보존한다. 모든 원초적 동사들의 원형은 펼쳐진 사방 속에서만 자라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비유조차 걷어버린다면, 그리고 그것을 정신이 향하는 하나의 단절된 대상으로 여긴다면, 공간이란 균질하며 평면적이고 직각적인, 요컨대 수용된 실재에 따라 조작되는 낡은 허공일 뿐이다. 유클리드가 그려놓은 직각사각형의 내부적 광활함은 사상事狀의 부재를 동반한다. 그리고 그 부재가 정신의 선험적 규정임을 내포하게 될 어떤 시기를 지나면서, 공간과 장소의 이중적인 추상화는 후자를 우리가 거주하는 일상적인 현실태로, 전자를 학자들scholar이 사용-가능한 비일상적 가능태로 분리한다. 그렇게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과학과 상식, 심지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조차, 공간을 분석analysis과 동일화의 지성적인, 명료하고 순수한 사고의 단위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차이와 농담을 제거한, 유일무이한 보편성의 척도로서. 공간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었을 수많은 존재의 양태들과 심리적인 속박들은, 이제 공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존재 자체에만 채색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신은 존재가 처한 공간의 내밀함 자체를 거대한 복합구조위상으로 구분하거나, 사상된 공간성과 다양한 구체적인 체험들을 무채색 계조gradation의 극점들로 연출하기도 한다. 때로 비유클리드적 선율들에 잠재된 공간의 여백들을, 버름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허나 그러한 설명들은 여전히 그 자신에 의해 -- 바란다면, 개념에 의해 -- 운명지어진 한계를 적절히 표명함으로써 그 운명 자체를 합리적인 형태로 포장한다. 즉 그들은 정신의 만족과 이론의 완성 속에서 상호간의 매우 적합한 형태를 추동하고,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계를 정제된 요소들로부터 발전된 최선의 선택들로 간행한다. 설령 정신이 그것의 부족함을 인정한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것은 변수들이 기능하는 내부에 어떠한 음영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의 농익은 결실이 자신이 생성된 토양을 설명하려는 순간, 그 풍부한 열매들은 토양이 갖는 모든 굴곡들을 자신의 껍데기로 뒤덮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사유하는 정신에게 있어 공간은 그토록 다층적인 의미를 제거한 잉여물처럼, 그 의미들이 놓이게 될 단순한 공백처럼 여겨져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현상학자가 발견한 시인의 공간, 즉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탄생한 공간의 이미지는 그러한 무미건조함으로부터 벗어난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공간 자체가 시인들에 의해서만 포착 가능한, 그렇기에 학자들의 시선으로부터 빗겨나간 비밀스런 이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그것은 시적 상상력이 미치지 않을만큼 무관심한 대상이란 전연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간의 파악에서 강조되는 시적 언어의 특별함은 공간의 올바른 파악이 아니라, 공간을 마주하는 -- 일반적인 형식상에서는 학적 혹은 시적일 어떤 대상을 마주하는 것으로 설명하게 될 -- 정신의 상이한 전개로부터 발생한다. 어쩌면 이들 각각이 세계를 향하는 정신 활동의 상이한 층위들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단지 충분하게 알려진 정신 활동의 너비에 대한 언급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는 실상 불충분하게 말한 것인데, 시인들의 상상력이란 도무지 세계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공간에 관한 이미지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공간으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시적 상상력에 의해 파악되는 삶이란 더 이상 현실의 이중적인 카테고리에 머무를 수 없으며, 따라서 공간의 이미지는 공간의 기하학적인 제도로부터 벗어나 상상력의 모든 층위들과 더불어 삶의 내밀한 깊이를 확대시키는 지표가 된다. 이 지표는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현실로부터 산출되거나 그것에 부여되는 개념과 정의들로 구성되지 않는, 상상력 자신에 의해 독려된 깊이로의 출발점이란 점에서 스스로를 가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현상학자가 말하는 공간의 이미지들, 우리가 그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공간의 원초적인 이미지들은 어느 것이라도 공간 그 자체를 새롭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진정한 상상력의 활동은 단순히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는 것이다. 즉 그것은 현실로부터 길러진 탈각된 형상들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작스레 솟아나는 창조적 세계의 원형들이다.
앞서 말했듯 이 순간은 초월적이다. 그들은 항상 새롭게 변하며, 의지와 목적에 의해서 온전히 주도될 수도 없다. 여기엔 도대체 어떤 객관성과 고정된 관념이, 과거의 경험이, 위대한 이상理想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상학자의 탐구는 우리의 일상이 담겨있던 하나의 균질화된 공간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고 또 다양한 질적인 가치가 더불어 칩거했음을, 진실로 보여주고자 한다. 거기에서 집과 -- 그 집에 의해서 한계지워진 -- 세계가 전달하는 거주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읽어내는 거주의 이미지들과 호응하면서 셀 수 없는 방식으로 공간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킨다. 물론 상상력은 물질들에 사로잡힌 거주에 대한 내밀함을 잊지 않으며, 때로는 서랍과 상자, 자물쇠의 비밀스런 심리학을, 때로는 새집과 조개껍질에 담긴 회귀로의 희망을, 그리고 그 움츠러든 희망을 위해 건설된 제 구석들을 꿈꾼다. 그렇게 이미지들은 테트라크리스tetrakrys의 극대와 극소를 오가고, 열림과 닫힘, 안과 밖, 내밀한 소급과 광대한 무한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공간에 대하여 정해진 법칙들과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서로의 변증법적 관계로서만 올바르게 풀이될 수 있는 원초적인 경계에 이르며, 기하학적 제도, 재산과 욕망의 우시아는 창조적 이미지에 입각한 현상학적 분석에 있어서 끊이지 않는 풍요로움, 잊혀진 기억과 향수의 원천, 시적 순간에 머무르는 행복한 거주의 이미지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간은 존재의 양태가 아니라 기억의 질감으로 화하고, 세계는 정신geist의 등가물이 아니라 삶의 기관organ으로 화한다.
그 모두는 오직 우리가 그것에 귀기울이며, 세심한 시선들을 헛되이 버리지 않을 때에만 가치있어질 것이다. 근시적인 충동으로 둘러싸인 소유의 성전이자 세계와의 단절을 일구는 직선적인 반향에 불과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버려지고 잊혀진 채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유연한 관심을 가지며, 익숙한 의미를 재고하려는 시도들을 대상들의 빛바랜 먼지들로부터 건져올리려는 순간, 그렇게 나타나는 이미지들의 창조적인 생동성,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자유로움, 훌륭한 표상이 이끄는 몽상의 대담성은 대상의 현실성, 규격화된 의미, 정신병리학적 괴물들, 심리학적 현실의 번역, 언어의 메타포, 해석에 의해 손쉽게 변질되는 무의식적인 충동들을 넘어선다. 그로부터 정신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세계가 어떻게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영혼에까지 이르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그러한 이미지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현상학자의 심중이 닿아있는 선택의 표지는 거기에 서 있다. 이를테면 그는 지나칠 정도로 비극적인 정신이라도 행복으로의 소박한 의무와 욕망이 짐지워져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 이 희망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서서 이야기했다. -- 언젠가, 몽상가의 운명은 기계장치의 신 앞에서 예정조화의 실현으로 퇴락할 수 있으리라. 아니, 잠시나마 꿈꾸기에 지쳐 습관적인 지각과 언어로서 사실을 확인하려 든다면, 이미지들은 금세 죽어버린다. 그러나 명목상 존재하는 고결함이 연쇄된 과거와 미래를 회귀와 안식으로 돌보는 사이, 시인들은 순간의 깊이를 그것의 밖으로부터 직접 탐독한다. 그들 영혼의 고양高揚, 철없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자만과 제약된 일탈이 아닌, 창조적인 활동과 변증법적 일반화의 저 깊은 너그러움으로부터 시작될 존재론적 승화는 만개한 구원의 단어에 비할 바 없이 풍요로울 것이다. 그에 취한 영혼은 스스로를 책망할 여력이 없다. 그들은 점차 더 멀리 나아가며, 보다 더 내밀한 공간을 발견하고, 더는 헤아릴 수 없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할 따름이다.1
조각난 파편의 이름표를 떼어버린 세계는 염원하는 상호 주관성이 아니라 고독한 몽상가에게 섬광처럼 흐트러진다. "향연symposium"이란, 그러므로 시인들에 의해 주도된 권리헌장의 머리말 한 켠을 장식할 것이다. 그들을 향한 몽상의 축사祝辭는 물리법칙의 효용성이 증명가능한 감각적 수단들을 넘어서 불가해한 삶과 일체된 영혼의 제마디에서 흘러나온다. 논변이라 불렸던 그의 글귀는 엑소더스exodos로 귀결한다. : 언어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삶의 모든 깊이들을 탐험하라. 비록 그것이 한갓된 꿈일지라도. 비극적 현존보다는 차라리 꿈꾸는 것이 낫다. 최소한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 이 탐색은 언어의 표현 방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현상학자가 들어올린 위대한 작품들의 심미적 가치는 언어가 아니라 존재로부터,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직접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본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