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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oétique de l'espace, "공간의 시학" : [Part 1] The poetic optimism








  『공간의 시학』에서 는 말한다.[각주:1]

"좋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리들을 시인의 미로 같은 몽상에서 떼어 놓을 때에라도, 그렇더라도 시인이 그의 시작품을 몽상가의 함정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비판적인 정신이 뭐라고 해도 소용 없는 것이다. 곡선이 따뜻하다고 몽상가가 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시적인 사실이다."[각주:2]

  시학 또는 시적 이미지에 관한 존재론으로 불릴 수 있는 그의 저서에 있어서, --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격상되어 보이는 -- 시적 의미의 건전성 여부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비판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가리키게 될 '우리들'은 누구인가? '우리들'을 안내할 '시인'이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자신들의 언어에, 자신들의 결과물에 그가 탐구하는 의미들을 진정 부여하고 있는가? 애초에 그는 왜 그들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즉 '시적인 사실'에 대응하는 정신이란 그에 대한 의미 부여가 유효한지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먼저 묻게 될 것이다.

  변론의 첫 장은 오로지 시인들에게만 허용된다. 시적 언어의 생산자인 그들은 시적 의미의 비의성에 대해 가장 원초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들의 고백이 시적 의미를 결정짓는 유일한 근원임을 옹호할 만큼 친절하고 너그러운 -- 한편으로는 무미하고 게으른 --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일련의 비평가들과 첨예한 에고이스트들, 잠재적인 몽상가들에게 각자의 헌장을 낭독할만한 여유를 빼앗는 것은 실로 지적인 오만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완성된 변론은 수많은 이들의 공동서면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그의 이름은? 영리하게도 그는 자신이 학자임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시인의 권리에 동반되는 원초적인 의무와 책임을 신념과 겸손에의 선언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시적인 사실이란 말의 무게를 위하여 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라건대 그들은 시를 써야 한다! 시적인 사실들로서의, 시적 순간kairos의 절대성으로부터 창조된 진정한 시를. 그러나 시의 철학이란 -- 그것이 철학으로서 지니게 될 전통의 무게를 탈피하는 것과 별개로 -- 제 힘을 가누지 못하고 스러진 위대한 창조물들을 슬그머니 들어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말하자면 저자는 문제의 서막으로부터 한 발 나아가, 고고高高하게 창작된 시작품들을 통해 상상력을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논변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를 상상력과 그에 의해 창조된 시적 이미지들을 다루는 현상학자phenomenologist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로부터 현상학phenomenology의 너른한 가지들을 모두 떠올릴 필요는 없으리라.[각주:3] 하지만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는 시인이 아님을, 따라서 정신geist의 시적 의미에 관한 비관론이 시적 현상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그것의 생산자들에 의한 수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처럼, 그의 낙관론 역시 그들의 반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떠올릴 필요는 있겠다. 시적 순간에 관한 그의 낙관은 진정으로 놀랍다. 그는 시적 이미지가 일으키는 존재의 울림 속에서, 하나의 대상에게 선언되었던 명사가 몽상하는 내면의 형용사로서 새로이 태어남을 본다. 사유하는 정신이란 늘상 앎의 조건을, 존재의 한계를, 가치의 도덕을 연역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사유가 스스로 지워버린 대상을 찾아 헤맬 때 몽상은 충실히 대상에게 붙잡히고, 사유가 잃어버렸던 수많은 경험들은 몽상의 시간에서 넘쳐흐르며, 사유가 박제한 모든 가치들은 몽상의 깊이를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정신esprit은, 그로부터 자신이 언제나 스스로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고결한 존재임을, 어떠한 한계에 의해서도 온전하게 결정지어질 수 없는, 그 한계가 그어진 경계 속에서조차 수많은 깊이를 내재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임을 느낀다. -- 그는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와 세계를 이끄는 무한한 흐름조차 넘어서서 모든 과거와 모든 현재, 모든 미래를 단 일순에 바꿔놓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 시란 단순한 언어유희, 주어진 세계에 관한 성숙한 통찰과 미려한 표현들로 이루어진 기념비가 아니라 상상력과 이미지에 의한 존재와 세계의 새로운 창조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에 대한,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대한 긍정이며, 무엇보다도 자기 존재에 대한 한계없는 긍정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얼마나 깊은 운율이 시에 허용되는지! 이 낙관은 그의 언어로도 이르지 못할만큼 거대하고, 열망적이며,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그가 청중들에게 동의를 구하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는 비판적인 정신이 그에게 자신의 권능을 이해시켜야만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몽상하는 자 역시 자신의 무해한 소요逍遙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를 향한 거부를 되돌리기 위하여 몽상의 시편을 벗어나는 것보다 그에 동의하는 소수자들의 침전된 미로를 거니는 것이 더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는 좀처럼 자신의 권리를 해명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 이렇게 묻는 것은 분명 사유의 습관적인 집착일테지만 -- 그는 왜 그것을 그토록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원숙한 현상학자의 손에는 시적 교감의 보편적인 성격이 들려있다. 만약 그의 청중들이, 다소 중립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시적 언어와 보다 덜 중립적으로 논의될 시적 이미지의 현상학적인 상관관계를 의식-초월적 대상과 표상representation, 표현expression이 평행하는 이분법 -- 이 경우 삼분법이지만 -- 및 상상력과 감성aesthetic에 관한 낡은 견해들로 치장하는 것을 우선 반대한다면, 그의 근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전자에 있어서 내적 경험에 관한 일설은 기껏해야 상호주관적이며, 교감이란 주관적인 경험들의 침전된 고요 속에서만, 그 경험들에 부여된 주관성의 피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매우 영민한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지한 몽상가들의 감상이란 그보다 더 가치있는 법이며, 그렇기에 시적 의미의 발생과 교류가 존재한다는 현실 자체가 이미 시적 현상의 고립성과 폐쇄성을 거부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 또한 그 모든 독자의, 모든 시인의 개별적인 변명들을 초월하여 정신esprit의 보편적인 전개를 꿈꾸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현상학자는 시에 섬광과도 같은 영능을 부여하는 한편 이미지들의 탐구를 상상력의 직접적인 존재론으로 다루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그들이 한낱 꿈이라는 것, 언젠가는 깨어져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미약한 눈속임이라는 한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는 투정 또한 빈약하다. 지속에 의해 빠져나가고 동질화되고 유연해지는 현실의 한 켠에서, 거대하고 일관된 무채색의 경계들 안에서, 극도로 이질적이고 순간적인 현시란 결단코 그것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실로 그 순간이, 역설과 모순에 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장단長短을 지녔다면, 이는 지속하는 삶의 현행성으로부터 어떻게든 자라나고 또 어떻게든 거기에서 잠들 것이다. 모든 기억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므로 찰나刹那,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축복일 수 있다. 허나 시적 순간이 드러내는 양면감정변존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언어적 표현에 의해 구상되는 시적 메타포를 도무지 구별할 수 없도록 몽그라진 정신에게도, 시적 심상을 위한 반유로부터 시적 순간의 발견을 위한 존재론적 해방을 좀처럼 갈라놓지 못하는 의식에게도, 발언의 기회는 있어야 한다. 현상학자가 자신의 낙관을 위해 바스러진 사유의 조각들을 털어버린 것처럼, 그들 역시 이 놀라운 문장들을 제 집으로 가져가 하루 종일 뒤적거리며 노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적 순간이란 어째서 절대적일 수 있는가? 현실로부터 나타나 세계를 향하게 될 언어와 이미지들의 익숙한 탄생이, 그 모든 동기화의 욕망들에도 불구하고 탄생하게 될 시적 순간의 명멸과 더불어 있음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만약 시적 순간이 그 자신의 침묵, 그 자신의 태어남, 그 자신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더라도 무엇이 그러한 표현들에 걸맞게 스스로를 격상시킬 수 있도록 돕는가? 단편적인 계기들로부터 내적인 지속을 직관하는 것과 그로부터 솟아나는 순간들을 통해 지속의 형식적 모순과 숨겨진 본질을 직관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지속의 수평적 안도감을 벗어난 극적인 순간들의 깊이를 노래하려는 것. 그건 그 순간에 의해 나타날 지속의 형식적 파괴가 내적 지속의 비인과적 흐름을 하나의 모방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그 모방이 순간 속에 내포될 수 있는 무한한 계기들의 모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순간이 감지한 무언가를 삶의 총체성으로 밀봉하여 일방적으로 선언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비극적 낙관론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그것을 되돌릴 수 있을만큼 충분히 무거운 삶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에움길을 헤매고 있으며, 부질없는 정신geist 또한 운명처럼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양자의 대립이 서로의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것이므로, 화해 또한 각자의 것이라는 생각만이 이 어색한 동거를 합리화할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 이 단어는 보기보다 많은 여유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 그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1. 번역본은 다음을 참조했다.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옮김, 『공간의 시학』(서울: 동문서, 2003). 한편 이하 본문에서 '그' 또는 '현상학자'는 이 책의 저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Ibid, pp.266-68. [본문으로]
  3. 그의 자기소개는 한편으로 이미지들의 원천인 상상력에 관한 철학사적 논의들의 긴 도래를,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에 관한 넓은 수용을 포함하고 있다. 근대를 지나 현상학의 원숙기에 이르러서도 상상력이란 작용연속체의 현재 국면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 작용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여기서의 상상력이란 기본적으로 의식의 소여된 바를 전제로 나타나는 간접적인 인식, 현전화된 지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현상학자는 상상력을 이미지 그 자체를 직접 창조하는 능력으로 확장시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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